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패트릭 유잉 (문단 편집) == 여담 == * 패트릭 유잉 항목이 생성된 초반에는 주인공이 유잉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내용은 조던의 유잉 관광스토리가 절반이 넘었었다. 뭐 조던의 피해자야 차고 넘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유독 그는 하필 조던과 동년배에 1년 차이로 데뷔, 전성기도 겹치고 컨퍼런스까지 같은 덕분에 정말이지 매년 치이다시피 했다.[* 조던의 팀에게 유잉만큼 많이 물 먹은 레전드는 '''없다'''. [[찰스 바클리]]는 커리어 통틀어 조던에게 플레이오프에서 3번 졌고(피닉스 1회, 식서스 2회), 캐브스의 [[브래드 도허티]], [[마크 프라이스]]는 4번 졌으며, [[알론조 모닝]]은 2번 졌고, [[칼 말론]]&[[존 스탁턴]]도 2번, [[레지 밀러]]는 의외로 1번만 만나 1번 졌다. 도미니크 윌킨스와는 아예 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나 유잉은 조던의 팀을 무려 5번이나 만나 전패했다. 그것도 그 중 1번만 1라운드 탈락이고 2라운드 3번, 3라운드 1번이었다. 더 중요한 건 62년생이던 유잉이 전성기 나이이던 90년대 초반에 3년 연속으로 조던의 팀을 만나 3년 연속 탈락했단 것. 특히 조던의 팀보다 팀전력이 우위를 점한 유일한 시즌인 93시즌 컨퍼런스 결승에서 홈코트어드밴트까지 얻고 첫 두경기를 따내고도 5차전을 동료 찰스 스미스의 삽질로 놓치고, 결국 리버스 스윕(2승4패) 당한 것은 그야말로 한맺힐 경험.] 게다가 4대 센터 가운데 홀로 우승 경험도, MVP와 같은 상복도, 동료들 운도 없었다. 스탯 우위도 없는 탓에 평가 또한 나머지 3인방(올라주원, 로빈슨, 오닐)에 비해 가장 안좋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은근히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기도 했으며, 제대로 맞붙은 94 파이널에서 올라주원의 휴스턴에게 3승 4패로 1승이 모자라 우승을 놓치는 바람에... 적어도 이 때 한 경기만 더 이겨서 우승을 한 번 했다면 4대 센터 중 최초로 우승을 달성한 프리미엄 때문에라도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획실했기 때문에 유잉 커리어에 있어서는 가장 아쉬운 부분.[* 이는 유잉 팬들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도 큰 차이가 아닌 단 1승이 모자라 3승 4패로 우승 문턱에서 좌절했기 때문에... 반면 그만큼 플레이오프에서 올라주원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어마어마했다. 유잉 못지 않은 피해자로 데이비드 로빈슨이 있는데, 로빈슨은 정규 시즌에선 올라주원과의 맞대결에서 여러번 우위를 점했으나, 1995년 플레이오프에서 역대급 하이라이트 필름에 절대 빠지지 않는 드림쉐이크와 함께 호되게 털리며 이미지가 훅 가버린 탓에 로빈슨이 늘 올라주원에 발렸다고 세간에 잘못 인식이 되어버린 예가 있다.] 속칭 4대 센터의 첫판왕이였다. 조던 외에도 [[스카티 피펜]][* 여담이지만 1994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피펜이 유잉에게 덩크를 먹이고 뒷걸음치는 유잉을 손으로 마구 밀치며 넘어뜨린게 피펜의 가장 유명하고 멋진 덩크라 하일라잇에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이 때문에 빡친 유잉과 닉스 선수들 사이 싸움이 날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피펜이 인성에 문제가 있었다거나 한 건 당연히 아니고 당시 그만큼 불스와 닉스 사이의 라이벌 관계가 극에 달했으며 (조던이 불스는 이끌던 91~93시즌 3년 연속으로 닉스를 탈락시켰다. 그러나 닉스 역시 92,93시즌에 불스가 가장 고전한 팀이었으며, 거친 플레이로 불스 선수들을 괴롭혔다) 실제로 이 시리즈 도중 관람온 데이비드 스턴 총재 앞에서 양팀이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만큼 두 팀 사이의 라이벌 관계는 치열했으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인 조던과 유잉 역시 주먹다짐을 할 뻔했었다. 여담으로 피펜의 준시그니처 라고 할수 있는 에어 모어 업템포 닉스 색상이 2017년 출시되었는데 피펜이 유잉을 상대로 인 유어 페이스를 하는 장면이 인솔에 그려져 있을 정도이다.], [[앤퍼니 하더웨이]]에게도 인 유어 페이스를 당한 적이 있으며 그 장면들도 상당히 멋진 모습들이라 하이라이트에 자주 나온다... * 그래도 선수 자체의 인지도나 인기로 치면 [[데이비드 로빈슨]]보다는 우위다. 세계의 중심이라 불리는 뉴욕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도 하거니와 80~90년대 조던에 집중된 매스컴 덕분에 매년 치이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송이 돼서 그런 듯. 심지어 매년 치이는 게 불쌍해서 안티조던 유잉빠가 된 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 한편 플레이 스타일도 중반부에 장착한 미드레인지 게임을 제외하면[* 슬램덩크의 영향인지 아마추어 농구를 연상하는 건지 정통센터는 중거리에서 슛을 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NBA 기준으론 오히려 옛날부터 모든 정통센터들은 중거리슛 능력이 있었다. 60년대 윌트 체임벌린부터 시작해 윌리스 리드, 카림 압둘자바, 모제스 말론, 로버트 패리쉬, 유잉, 로빈슨, 올라주원, 알론조 모닝 등 슈퍼스타 센터들은 거의 모두 중거리슈팅력이 있었다. 빌 러셀같은 수비형 센터를 제외하고 공격력이 뛰어난 슈퍼스타 센터들 중 아예 슈팅력이 없는 선수는 사실상 샤킬 오닐 뿐이었다. 즉, NBA에서 센터의 표준은 오히려 어느 정도 중거리슈팅력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지 마이칸같은 4,50년대 선수가 아닌 이상.] 정말 센터의 표준과도 같기에 90년대 NBA 열풍이 불었을 당시 흔히 센터 하면 떠오르는 선수로 대부분 패트릭 유잉을 꼽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연재된 슬램덩크의 채치수 또한 연습경기에서 33번을 달고 있는 걸 보면... * 2004년 뉴욕에서 열린 [[레슬매니아 20]]에서 [[존 시나]]가 유잉의 유니폼을 입고 나와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장소가 닉스의 홈구장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기 때문이다. [[https://www.wwe.com/f/styles/gallery_img_ml/public/all/2018/02/WMXX_03142004rf_1233--a41561534a7ba030091d1fb8eb6d4496.jpg]] 유잉을 언급하기도 했다. [[https://www.dailymotion.com/video/x7ugxmz]] * 기본적으로 워낙 팔이 긴 편인데 흰색 보호대를 양손팔목에 착용해서 신기하게 더 길어보인다. 또한 슛폼이 부드러운 편은 아니지만 미들점퍼시 타점이 워낙 높아서 사실상 블록이 불가능 했던 센터이다. 사실 슛폼 자체는 정석에서 거리가 먼, 엄청나게 높이 팔을 치켜들고 던지면서 마지막엔 거의 한손으로만 던지는 (정석폼은 거의 마지막까지 왼손이 받혀준다) 특이한 폼인데다 슛릴리스 타이밍도 엄청 늦다. 거의 점프가 정점을 찍고 내려올때 쏘는 수준인데, [[데이비드 로빈슨]] 역시 폼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타이밍이 느렸다. 물론 둘 다 이런 폼으로도 성공률이 높았다. 다만 슛을 릴리스할 때의 슛터치 자체는 굉장히 부드러웠기 때문에 예쁜 곡선을 그리며 림에 빨려들어가곤 했다. * 반대로 손은 거대한 덩치에 비해 희한할 정도로 작다. 이는 긴 팔과 정반대로 센터로선 단점인데, 센터는 볼을 잡고(드리블 없이) 바로 하는 플레이가 많아 볼캐칭 및 볼핸들링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 다만 [[모제스 말론]]처럼 한 손으로 볼을 못 잡을 정도로 작은 건 아니라 결정적인 단점까진 아니었다. 원핸드 덩크도 무난하게 할 정도는 되고.[* NBA 관련 글을 보면 palm (한 손으로 공을 움켜잡는 것)을 못 한다는 묘사나 본인의 언급이 나오는 선수들이 종종 보이는데 [[카멜로 앤서니]], [[케빈 듀란트]],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빅맨인데도 거의 일반인 수준으로 손이 작은 [[모제스 말론]] 등이 있다. 그런데 코비는 본인 입으로 공을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한 선수인데 사진을 찾아보면 분명 경기 중 공을 한 손으로 잡고 수비와 대치하는 장면이 있다. 이는 이들이 "한 손으로 못 잡는다"는 의미가 경기 중 자유자재로 한 손으로 잡고 마음대로 갖고노는 수준이란 걸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구공은 표면의 돌기가 있고 그 재질 덕분에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손 크기와 악력이 있으면 한손으로 잡는게 크게 어렵진 않고, 특히 NBA 규격 농구공은 국제규격 공보다 더 잡기 쉽다. 코비의 경우에도 보듯 손이 작다곤 해도 20cm는 가볍게 넘기는 저 선수들이 실제로 공을 못 잡을리는 없다. 그러나 palming을 잘하는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처럼 공을 마치 핸드볼처럼 쥐고 허공에다 휘젓거나 한손으로 잡고 패스를 하는 척 하다가 다시 끌어와서 슛을 하는 등 갖고 노는 수준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공이 손 안에 쏙 들어와 그냥 가볍게 쥐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여야 한다. 악력을 이용해 겨우 잡는 수준이면 손가락까지 힘을 주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저런 볼핸들링은 못하고, 위에 언급된 선수들은 손가락까지 이용해야 공을 잡는 수준이기 때문에 "한 손으로 못 잡는다"고 하고 다니는 것이다. 즉, 정지상태에서 잠깐 한 손으로 잡는 것까지만 가능하다면 NBA 기준으론 palming이 불가능한 것.] * 현역 시절 내내 고질적인 무릎 부상에 시달렸다. 그 무릎 부상 덕택에 대학 시절의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상실한 채로 NBA 커리어를 보냈다. 커리어 내내 총 4차례의 무릎 수술을 받았다. 경기 때 착용한 양 무릎의 두툼한 무릎 보호대는 유잉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다. * 선수 생활 전반을 박살낸 조던과 사이는 좋은 편이다.[* 조던의 불스와 플레이오프에서 다섯 번이나 만나 전부 다 졌다. 조던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적이 13번에 불과하고 초창기에는 팀 전력이 매우 약해서 1라운드에서 광탈당하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유잉의 닉스는 거의 연례행사급으로 불스에게 깨진 셈. 특히 불스의 첫 스리핏 기간인 91~93 시즌에는 3년 연속으로 불스에게 패배했는데, 93 시즌 닉스가 유잉 시대 최고성적인 60승을 거뒀고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있었으며 시리즈 초반 2승0패로 앞서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점. 유잉 시절에 유일하게 불스에게 거둔 플레이오프 승리는 94년이었지만, 다들 알다시피 이때는 조던이 없었다. 조던은 이를 두고 "마치 동네 깡패(bully)가 형이 없을때 동생을 괴롭힌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고, 복귀한 이후 붙은 96 시즌에 4승1패로 승리했다. 다만 이때 닉스는 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를 안긴 유일한 동부팀이었다.] 조던이 절친한 친구로 지내는 몇 안되는 스타 플레이어로, 조던의 워싱턴 복귀 당시 유잉은 친구의 소속팀인 워싱턴 코치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경력의 첫발을 내딛기도 했다. 또 같이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고. 그 영화가 바로 [[스페이스 잼]]. 그 외에도 같이 뛰었던 동료 선수들은 물론 타 팀의 많은 선수들과도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덕택인지 은퇴식에 와서 축하해 준 선수들 중 닉스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대외적으로 알려진 최고의 절친은 대학 후배이기도 한 [[알론조 모닝]]. * 반면 선수 생활 동안 언론과는 썩 좋지 않은 관계였는데 이는 극성스럽기 짝이 없던 뉴욕 언론에 대해 유잉이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유잉이 뉴욕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대개 풋볼이나 야구, 농구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뉴욕을 거친 많은 스타급 선수들이 언론과 투닥거리다 진저리를 치며 먼저 뉴욕에서 떠나버린 케이스가 많았던 반면, 유잉은 아무리 가십성 기사를 써도 상대를 해주질 않았고 이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며 15년까지 이어지자 언론이 먼저 제풀에 나가떨어진 케이스.] 말이 많아야 기사거리가 늘어나는 기자들 입장에서는 말없이 플레이에만 집중하는 스타일의 유잉은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때때로 리그 차원에서 의무적으로 임해야 하는 경기 후 인터뷰마저 거부하여 벌금을 물기 일쑤였다. * 현역 은퇴 후 코치로서는 4명 중 가장 좋은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다. 워싱턴 위저즈 - 휴스턴 로키츠 - 올랜도 매직을 거쳐 2013-14 시즌부터 그 분이 계신 [[샬럿 밥캐츠]]의 어시스턴트 코치를 역임하고 있다. 오랜 코칭기간 동안 감독 수업도 꾸준히 쌓아왔으며 2013년 11월 8일부터 샬럿의 스티브 클리포드 감독이 심장 수술로 몇 경기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되어 비록 정식은 아닌 감독 대행이긴 하지만 어쨌든 커리어 첫 감독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감독 데뷔전이 친정팀 뉴욕 닉스전이었다. 결과는 패배. 감독으로서의 첫 승리는 2013년 11월 13일 보스턴 셀틱스 전에서 기록.] 2017년 4월 3일, 모교인 [[조지타운 대학교]] 농구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 현역 시절 [[샤킬 오닐]]과 같은 컨퍼런스였던 탓에 4대 센터 중에서도 유독 그와 매치업을 자주 하며 신경전이 잦았다. 특히 오닐은 경기장 안팎에서 유잉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1999년 직장폐쇄 당시 선수협을 비판하며 회장이었던 유잉까지 싸잡아 독설을 날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닐은 은퇴 후 유잉에 대한 존경심을 여러번 드러내었고, 특히 자신이 진행하는 NBA Game Time 프로그램에서 유잉을 만나고 난 후 눈물을 흘리면서 유잉이 자신의 어릴적 영웅이었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유잉을 그렇게 대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라데 영화에서 제자가 최고가 되려면 스승을 이겨야 했던 것처럼, 유잉이 자신보다 낫다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해서라도 스스로를 밀어붙여야만 유잉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고. 그러면서 유잉은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위대한 승부사이자 위대한 선수로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역대 Top 5 센터에 유잉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객관적인 커리어는 오닐이 유잉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오닐의 이러한 자기고백은 당시 나름 화제가 되었다.[* 사실 오닐의 말투 때문에 국내 팬들 사이에서 그가 유잉을 무시한다고 오해가 생긴 것도 있는데, 오닐은 "유잉이나 모닝같은 Georgetown boys는 한쪽으로 페이크하고 다른 쪽으로 멍청한 러닝점프훅(dumb-ass running jump hook)을 날린다"고 묘사했는데 정작 본인의 레파토리를 설명하면서도 똑같이 "멍청한 러닝점프훅"이라는 단어를 썼다. 전직 NBA 선수들이 여러 노가리를 까는 NBA Open court란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진 중 하나가 오닐이고 이 프로에서 오닐은 유잉에 대해 여러번 언급한 바 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오닐은 결코 유잉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기가 성장할때 패트릭이 터프(mean)해서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선수들을 꼽으면서 유잉의 맹렬함(ferocity)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 사실 샤킬 오닐은 승부욕과 자존심이 너무나 강해서 자신들의 우상을 현역시절엔 오히려 깔아뭉개는 경향이 강했다. [[데이비드 로빈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로빈슨을 대상으로 "로빈슨이 내가 어렸을 때 나를 무시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승부욕을 불태웠던게 오닐이다. 그런만큼 존경하는 유잉 역시 저런식으로 폄훼했던 것. 자세히보면 오닐이 유잉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은 거의 커리어 초창기로, 아직 유잉과 닉스가 오닐과 매직에게 무서운 라이벌로 존재하던 시절이다. 말년의 초라해진 유잉을 상대로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발언을 한 적은 없다.] * 의외의 사실은 오닐과 매치업한 선수 중 한 경기에서 가장 뛰어난 기록을 쌓은 선수가 다름 아닌 유잉이었다는 점. 정규 시즌 기준으로 오닐과 매치업해서 한 경기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유잉이 유일하다.[* 다만 플레이오프까지 포함시킨다면 하킴 올라주원이 1995 파이널에서 오닐을 상대로 35득점 15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적이 있다.] 또한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무려 8경기나 30득점 이상을 뽑아내 오닐을 상대로 가장 많은 30득점 이상을 뽑아낸 선수이기도 하다. 오닐이 NBA에 입성할 무렵 유잉은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 실제로 데뷔 초창기만 해도 유잉이 오닐보다 우세했다. 골밑에서는 밀렸지만, 기술적으로 우월한 유잉이 종합적으로 더 좋은 경기를 펼친 것. 실제 유잉과 오닐이 맞붙은 경기의 스탯을 보면, 오닐의 신인 시즌과 2년차 시즌 동안 유잉은 28.2점 13.1리바운드를 기록했고 오닐은 24.6점 1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 다만 팬들 사이에서는 유독 유잉이 오닐에게 처절하게 밀렸다는 인상이 강한데, 이는 첫째로 실제로 유잉이 우세한 경기력을 펼쳐도 일단 힘에서 밀렸기 때문에 겉보기로 보면 유잉이 크게 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닐은 유잉을 힘으로 밀쳐내고 덩크를 꽂아넣으면 유잉은 중거리 점퍼를 꽂아넣어 응수하는 식. 똑같은 2점이지만 언뜻 다가오는 느낌이 다른 것. 두번째는 둘이 같이 뛴 건 10년 정도 되는데 오닐의 3년차 때부터는 매치업에서 유잉이 확실히 밀리기 시작했고 세번째로는 두 선수가 상성이 매우 안 좋았기 때문이다. 유잉은 데뷔 초부터 무릎에 두툼한 보호대를 하고 다닐 정도로 무릎이 고질적으로 매우 안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닐이 등장하기 전까지 올스타급 이상 센터 중 최고로 꼽힐 만한 파워를 갖고도 균형을 잘 못 잡고 넘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노년에 몸이 망가지면서 이런 성향이 더욱 심해졌는데, 이때 오닐이 막강한 파워로 툭툭 치고들어갈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데다가 유잉같은 거구들이 몸까지 망가지면 한번 넘어지면 비틀거리며 잘 못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 더욱 힘을 못 썼던 것이다. 하킴 올라주원이나 데이비드 로빈슨같은 민첩한 센터들은 이를 스피드로 만회했지만 유잉은 그런 스피드도 없었기 때문에 말년에 더욱 고생했다. * 투박한 외모 덕택에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대학 전공이 미술이다. 실제로 굉장히 명석하고 똑똑한 인텔리 타입이라고 한다. 전성기 시절에 NBA 선수들이 꼽은 "월스트리트 금융가에 진출했을 때 가장 큰 성공을 거둘 것 같은 선수는?" 이라는 설문 항목에서 유잉이 1위로 꼽혔다.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선수협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 1993년 오프시즌때 우리나라에 유잉 농구화 홍보를 겸해서 2박 3일간 방한했던 적이 있다.[* 1993년은 농구화 대유행의 절정기로 샤킬 오닐의 시그내쳐 제품인 [[리복]] 샤크 어택이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절이었다.] 사업 때문에 방문한 것이지만 그 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클리닉은 물론 당시 MBC에서 방영하던 '쇼, 스포츠'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강원도 산간벽지 초등학교에 방문해 농구대를 기증하고 어린이 농구 후원 활동을 벌이는 등 짧은 시간 동안 봉사도 많이 해 주고 간 편. 은퇴한 지도 한참되었는데 그때 홍보한 농구화는 미국에서 아직도 판매하고 있다. 유잉을 잘 안다고 할수 없는 나이때의 빅뱅에 GD, 태양이 신고 나온 자료도 있고, 농구화 좋아하는 패션피플들이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bal77&logNo=90195301746|좋아하신다고 한다.]] 유잉 초창기 시절에는 [[아디다스]]에서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elacoix&logNo=150092882025|유잉신발을 만들기도 했다.]] * 아들로 패트릭 유잉 주니어가 있다.[* 참고로 아버지와 진짜 많이 닮았다. 왕콧구멍까지 [[http://www.gamblingbeat.com/sites/gamblingbeat.com/files/styles/large/public/field/image/ewing2.jpg|그대로 빼다박았다.]]] 그 바람에 유잉은 시니어를 달게 되었다. 주니어가 NBA에 입성하자 유잉을 기억하던 많은 올드 팬들은 주니어가 아버지의 반만큼이라도 활약해주길 바랬지만, 호부견자인지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다. 하부리그를 전전했으며 닉스에서 프리시즌 경기를 뛰기도 했지만. 2011년 [[뉴올리언스 호네츠]]에서 7경기 뛴 게 유일한 nba 경력이다. * [[엑소시스트 3]]에서 주인공의 부하 형사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엑소시스트 3 문서에도 나와있다시피 영화 배경이 유잉의 출신 대학인 [[조지타운대]]와 동일한 조지타운이라 성사된 캐스팅. 비중이 엄청 크지는 않지만 꽤 나오는 장면이 많은데, 본업이 배우가 아닌 인물의 카메오 치고는 연기도 무난해 어울리는 편이다. * 2015 드래프트 당시 뉴욕 팬들과 언론에게 거친 야유를 받은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에게 "너는 이미 뉴욕의 선수이며, 사람들은 차차 너의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격려를 건넨바 있다. 뉴욕에서의 긴 커리어 동안 극성맞은 언론과 싸워온 유잉에게는 포르징기스의 처지가 남 일 같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포르징기스(a.k.a 유니콘)는 트레이드되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났으며, 현재는 [[워싱턴 위저즈]]에 소속되어 있다. * 좀 개그성 에피소드인데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가드 겸 포워드 제일린 로즈에게 도둑질을 당한 적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rCO1lLBeP0&list=PLUIpjZlCZ5FSKRH487kq0AOO7t1I_t1D1&index=3|로즈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실력이 늘고 있던 로즈는 유잉이 자기를 파울했다고 생각했는데 파울이 안 불리자 열 받아서 자기 위를 넘어가던 유잉의 발을 걸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비가 걸린 모양인데 이걸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가 다음에 닉스가 인디애나로 원정을 왔을 때 우연히 공항에서 유잉의 짐을 발견했고, 디트로이트 본능이 발동해 상자를 억지로 열어보니 VCR일체형 TV가 있어 이걸 훔쳐갔다고 한다. 그렇게 훔쳐간 TV는 몇년동안 유용하게 써먹었다고... 재밌는 건 여기에 패트릭 유잉의 이름이 스티커로 붙혀져 있었는데 이걸 못 뗀 상태로 계속 두는 바람에 그의 친구나 가족들 모두 로즈가 패트릭 유잉의 TV를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 2020년 5월 23일, 조지타운대 감독 재임 중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고 병원에서 격리 치료를 받았으며, 이후 상태가 호전되어 자택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자신의 트위터에서 코로나19 [[https://twitter.com/CoachEwing33/status/1263964626271776769|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글을 올렸다.]] 다행히 건강하게 완치되었다. * 2021년 3월에 MSG를 방문했는데 그를 못알아본 구장 경비에게 제지를 당해서[* accosted라는 표현을 쓴 걸로 보아 경비가 단순제지 정도가 아니라, 험한말까지 곁들인 모양.] 제임스 돌란 닉스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 신원을 확인해줘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 ~~팀레전드도 못알아보고 잘하는 짓이다.~~ 당연히 유잉은 ''' “I thought this was [[매디슨 스퀘어 가든|my building]]. (…) Everybody in this building should know who the hell I am (…) Jesus, is this [[영구결번|my number in the rafters]] or what?” '''이라는 분노의 인터뷰를 남겼고, 열혈 닉스팬 [[스티븐 A 스미스]]도 방송에 나와 직원 교육이 엉망이라고 돌란 구단주를 무지막지하게 씹어댔다. [youtube(ghmUCp0E0R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